허연, 세상의 액면

Poetry
2023.03.06

39층에서 내려다본 이승의 액면.
뚜렷한 금이 사라졌다가는 이어지고,
거리를 가득 메운 세상의 수많은 모자들.
모자에 감춰진 금서들과
개 같은 여름의 추억들.
거칠기만 한 모서리들.

굴뚝 속에서 날아오르는 깨달음의 새들.
하나 둘 하나 둘,
일기를 쓰는 그날 저녁의 근육들.
야근조의 눈에 반사된 십자가.
숯이 되어버린 길 잃은 양들. 버스를 가득 채운 근심스러운 성자들.

폐수와 나란히 흐르는 생生.
전동차 속에 처박힌 외투들, 그리고
비슷한 무게의 이데올로기.
봉인되지 않는 회색 유골함. 출간되지 못한 서책들.
이승이라는 신전.
빨랫줄에 내걸린 무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