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고요 속에서
아마 나는 네가 붙잡았을 최후의 기억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이 흐르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폐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주겠네. 때때로 만나는 오아시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막 건너의 푸른 들판을 이야기하진 않으리. 자네가 절망의 마지막 벼랑에서 스스로 등에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설 때까지 일어서 건조한 털을 부비며 뜨거운 햇빛 한가운데로 나설 때까지 묵묵히 자네가 절망하는 사막을 가리키겠네. 낙타는 사막을 떠나지 않는다네. 사막이 푸른 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거대한 육봉 안에 푸른 벌판을 감추고 건조한 표정으로 사막을 걷는다네. 사막 건너의 들판을 성급히 찾는 자들은 ..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 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몽상가, 나는 내 발에 그 차가움을 느끼게 하네. 바람은 나의 헐벗은 머리를 씻겨 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무한한 사랑은 내 넋 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여인과 함께하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 김현 번역(민음사) 더보기 여름날 푸른 저녁에, 나는 오솔길로 가리라, 밀 이삭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러. 꿈꾸는 나는 그 서늘함을 발에 느끼리라. 바람이 내 맨머리를 씻게 하리라. 나는 말하지 않으리라, 아무 생각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무한한 사랑이 내 영혼 속에 차오르리라, 그리고 나는 가리라 멀리, 아주 멀리, 어느 집시처럼, 자연 속으로,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허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손과 손을 붙들고 마주 대하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흐르는 물결같이 세월은 지나간다 세월은 지나간다 사랑은 지나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날이 가고 세월이 가면 흘러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은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 송재영 번역(민음사) 더보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오오쓰카 아이의 노래 제목에서 빌려옴. 한겨울 기름매미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 사람에게 여름이란 계속 의심하는 흐름 늙은 맹금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갈 때 생긴 풍경의 빗금 속에서 당신이 걸어나온다 흔들리는 청보리밭을 지나 서사를 잃은 골짜기를 지나 여름보다 먼저 오게 된 사람이다 턱을 괸 벼랑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는 만조의 얼굴을 하고선 얼룩에게 어울릴 만한 얼룩을 고른다 구슬땀이 이곳의 경치를 짐작하게 한다 한겨울 철갑을 둘렀던 나무가 여름 내내 그대로인 풍경 속에서 무엇이 무엇을 견디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사랑을 꿈꾸었던 여름에 변압기를 내리고는 오지 않았었지 여름은 말라버린 갈증이다 증거 없는 상실이다 멀리 있는 건 한달음에 올 수 있어서 가깝고 희미한 건 때가 되면 오..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사랑이 한때의 재능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인간에게 아주 빨리 온다. 신념은 식고 탑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언제나 상상력을 넘어선다. 먼지 휘날리는 종말의 날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다행히 지칠 시간은 없다. 탑의 기억이 사라질 즈음 세상엔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긋지긋한 어떤 날이.
뭘 겁내 못 되돌려 그냥 지금 바라봐 여름이 장전한 눈빛을 알잖아 이제 와서 헤아리는 심정 생각보다 깊이 묻혔던 자기야, 부를 수 없이 저기요 별것도 아닌 일에 뒤돌아보는 고개를 봐 언제까지 저 뜨거운 뿌리의 자장을 외면하겠니 우리 본 적 없지만 기꺼이 너그러이 마음을 내어줄게 자기야 작약이 세계를 찢으며 터져 나오는 순간이야 하나의 장면이 태어나고 마는 기쁨으로 그러니 스스로의 무게에 놀라 고개를 떨구더라도 아름답기를 포기하지 말자 이른 낮잠처럼 자장자장 다독이며 사라지려는 꿈을 애써 덧대며 마음을 멈추지 말자 꼭 쥔 주먹을 조금씩 펼쳐내는 힘으로 휘몰아치는 작약에게 속삭이지 네가 나였으면 좋겠어 저기에서 자기까지 단숨에 피어나도록 스스로의 숙근을 자전하며 애태우며 서로의 문간을 서성이며 안녕 안녕 궤..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 소리처럼 담 결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리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첨벙첨벙 꽃이 피고 드디어 나무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꽃송이 속으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쏘다녔고 나는 물 장화를 신고 정원을 쏘다녔다 해당화 그늘 속으로 헤엄치는 날들이 많아졌고 여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나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몰라서 멈출 수 없는 놀이 매일매일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별의 일에 대하여 날마다 멀어지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말에 대하여 잠든 것들의 모든 기척처럼 번지는 핏방울에 대하여 손을 숨길 주머니도 없이 벗어둔 물 장화 속으로 물이 가득 차서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모퉁이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와서라고 할 수 있을까 끝은 얼마나 아파야 제 끝을 다른 끝에게 내어줄까 쓰러져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 세계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 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 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 지난 그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 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 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한 무리의 고래가 해안에 몰려들었다 썰물 때가 되어도 바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누구든 죽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다 거리를 뒹굴다 쓸려가는 낙엽들도 한때는 잉걸불이었건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이라기보다 화학적이다 한 평 남짓한 벽을 회칠할 수 있는 석회와 성냥 몇 개비를 만들 수 있는 인과 커피 몇 잔을 탈 수 있는 물로 환원될 뿐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다 아, 탄소가 빠졌다 주검이 남긴 탄소는 허공을 떠돌다 새 별을 만든다 살아 있는 것들의 동공에는 불꽃이 살고 있어 고래가 물 아닌 별로 돌아가는 게 화학이다 감전이든 감염이든 도망이든 기진이든 모든 죽음은 자살 아니면 의문사라고 당신을 보내고 내가 삼킨 문장들 식어가는 잉걸불처럼 가물대는 별 됐다 아침이면 삭제 가능한 부록 됐다 엔딩 크레딧의 별 책 부..
39층에서 내려다본 이승의 액면. 뚜렷한 금이 사라졌다가는 이어지고, 거리를 가득 메운 세상의 수많은 모자들. 모자에 감춰진 금서들과 개 같은 여름의 추억들. 거칠기만 한 모서리들. 굴뚝 속에서 날아오르는 깨달음의 새들. 하나 둘 하나 둘, 일기를 쓰는 그날 저녁의 근육들. 야근조의 눈에 반사된 십자가. 숯이 되어버린 길 잃은 양들. 버스를 가득 채운 근심스러운 성자들. 폐수와 나란히 흐르는 생生. 전동차 속에 처박힌 외투들, 그리고 비슷한 무게의 이데올로기. 봉인되지 않는 회색 유골함. 출간되지 못한 서책들. 이승이라는 신전. 빨랫줄에 내걸린 무희들.
들리나요 소문 없이 가고 노래도 없이 가고 들리나요 퍼지러앉아 온몸 살구덩이 흙창으로 주저앉아 들리나요 해어진 옷 사이로 벌건 어둠이 박혀 들리나요 벌겋게 그리움 내 자취는 그리움 들리나요 기어오르다 노래 내리다 노래 시커멓게 박혀 박혀 진저리 박혀 눈 부릅뜨다 아무것도 뵈지 않아 진저리 산천은 잎을 벌리고 받아내네요 들리나요 갤 것 같지 않은 막막한 막막한 너머의 주저앉는 것들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 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이 막막함이 달콤해지도록 나는 얼마나 물고 빨았는지 모른다. 헛된 예언이 쏟아지도록 나의 혀는 허공의 입술을 밤새도록 핥아댔다. 막막함이여 부디 멈추지 말고 나의 끝까지 오시길, 나의 온몸이 막막함으로 가득 채워져 투명해질 때까지 오고 또 오시길 나 간절히 원했다. 나는 이미 꺾이고 꺾였으니 물밀듯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길. 그리하여 내게 남은 것은 나뿐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미 낡아버린 루머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내 몸속에 새겨주시길. 내 피가 아직도 붉은지 열어보았던 날 뭉클뭉클 날 버린 마음들을 비로소 떠나보냈듯이 치욕을 담배 피우며 마음도 버리고 돌아선 길이 죽고 싶다는 말처럼 깊어지도록 밀려오시길. 막막함으로 밥 먹고 사는 날까지.
눈 속에 묻힌 발자국들 중에서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남아 빙하가 되나. 눈밭 위의 달 그 위로 너의 시계 바늘이 움직인다. 소리 없는 초침이 열두 시를 향해가고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너의 등 나는 너를 해치지 않는다. 나는 오래전에 이곳으로 떠나왔다. 나는 머지않아 이곳으로 떠날 것이다.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들 중에서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남아 보석이 되나 사라지는 밤들의 히치하이커로서 너는 손가락을 다시 펼친다. 네가 손을 흔들며 선 거기를 낮꿈같이 지나쳐 왔다. 너의 종착지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써 있었다. 너의 텐트가 한편에서 펼쳐지고 유성처럼 너는, 웃는다. 나의 꿈은 북극의 빛으로 반짝 환해졌다 어두워졌다.
운명이 나에게 불의 옷을 입혔을 때 나는 쉽게도 쓰러지고 말았지. 더이상 깊을 수 없는 불의 병(病) 속에 나는 오래 서 있었네. 운명으로서의 기하학. 저 모퉁이를 돌아오지도 않고 불어왔던 바람. 그 시험 속에 나는 조각조각 심장을 내바쳤네. 촛불의 복습을 하기 위한 가장 슬픈 칸나 꽃의 십자형 하프를. 백 개의 죽음 속에 도사린 저 백 개의 탄생. 백 개의 겨냥 속에 있는 저 백 개의 눈물 사냥. 그러고도 그것의 또 영원한 복습. 기하학의 운명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주고 말았네. 화려한 사랑. 스펙트럼의 꿈. 안전한 통행증 옛 계보마저도. 그리고 나도 싸움을 걸었다. 치료법으로서의 전쟁, 촛불의 천국에로 이르를 그 영원한 피의 복습을. 나도 조각조각 불을 가지고서 태양경(鏡)을 만들었네. ..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최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동시에 보아버리고 알아버린 생이 다시 올까 두렵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내 눈을 멀게 했다 끔찍하다 이 세상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 무엇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너무 많은 아름다운 풍경이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았다 처방전을 주고 색색의 알약을 삼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는 이미 잃을 것도 없고 얻고 싶은 것도 없는 시간들을 투약한 지 오래예요 눈 내리는 밤 제설차 밑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고양이 어떠한 자책도 없이 자신의 잠을 모두 쏟아 내는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할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초라했는지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노래해 밤아, 호수 바닥에 정박한 요람을 흔들어 줘 휘파람아, 일곱 낮과 일곱 밤으로 일곱 개의 꿈을 다 밀어내어 줘 천 개의 밤을 낳아 버린 단 하나의 대낮아 나를 둘러싼 빛깔들을 몰아내 줘 나를 산란해 줘 대낮을 내질러 달아나는 꼬리야 숨 가쁜 물방울들을 터뜨려 줘 파도를 일으켜 줘 다락방아 다락 속의 구겨진 긴 다리야 꿈속을 대신 달려줘 무너지는 지붕 위로 간신히 뜨는 하얀 달아 꿈속에 숨어 있는 한 이름을 비추어 줘 너의 커다란 눈으로 또 한 이름을 뒤쫓아 줘 단 하나의 자음을 기다리며 늙어 가는 모음아 나를 위해 무럭무럭 죽어 줘 아무것도 아닌 공터야 몸통이 달아난 바퀴들아 나를 노래해 줘 궤적을 그리며 굴러가 마침내 사라지는 표정들아 멈추지 말아 줘 눈먼 기차야 선로를 부수고, 선로를 부수고,..
나잇값만큼 깊어지는 여자의 우울과 우울을 모독하고 싶은 악의 때문에 창문 꼭꼭 닫아둔 여자의 베란다에선 여린 식물들부터 차례대로 말라 죽기 시작했다 볕이 너무 좋았으므로 식물들은 과식을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된 것이다 악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여자의 노련함 때문에 한 개의 꼬리가 아홉 개의 꼬리로 둔갑한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여자는 그림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를 친다 자기 기억을 비워내기 위해 심장을 꺼내어 말리는 오후 자기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헹구는 오후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홍등가가 되나 늙어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나이만큼 무한 증식하는 추억 때문에 여자의 심장이 비만증에..
학교 연못 옆 벤치에서 책을 읽다가 연못 속의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봅니다. 저 연못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검은 물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검은 연못 속에서 검은 여름이 어른거립니다. 정오의 태양은 머리를 풀고 잎사귀들은 축 늘어진 채로 반짝이고 바람은 책장을 넘기고 나는 검은 연못에 비친 여름을 봅니다. 저 연못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름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름에 죽는다*는데 저 검은 물이 피운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나는데 나는 눈먼 자가 되어 검은 연못을 바라봅니다. 깊어지는 어둠의 내부를 바라봅니다. 저 연못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이 눈먼 세계의 영원한 주인입니까. 저 검은 연못 위로 낙엽이 떨어지고 흰 눈송이가 떨어지고 얼음이 얼면 생의 마지막 여름은 그 첫여름을 기억할까요..
이유 없는 슬픔이 나를 불심검문하는 날이 있네 그런 때 마음은 쪽방에 갇힌 어둠을 가만 들여다보네 물결무늬로 흔들리는 눈동자 위를 떠가는 부유물 같은 기억들, 한때 절망은 일벌처럼 분주히 인간의 정원을 쏘다녔지만 벌집이 된 심연의 여왕벌은 까만 애벌레만을 생산했네 권태의 명수 무기력의 천재 우울의 가내수공업자 타락의 장인 불신의 성자 따위가 이 돌연변이의 별명이었네 그것은, 나는 내가 되는 공포⋯⋯ 홀로 될 때의 유령⋯⋯ 갈 데 없는 귀소본능만이 시나브로 흐려가는 영혼의 녹슨 엔진이었네 그렇게 마음자리에 비탄의 괴뢰정권이 들어선 날이었네 나는 어둠 속을 심해어같이 헤엄치는 쪽방에서 마음눈의 색맹이 되어갔네 온몸이 물속에 잠겨야 사는 침수식물처럼, 모든 물은 익사의 빛깔을 띠고 있다는 자네의 말은 옳네 공..
사랑스런 플랜더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예술의 말(馬)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현대의 이마를 바로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의학 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 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 피리를 깎고 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은 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강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현대의 고장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죄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
비 때문에 실내와 실외가 분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폭풍우의 효과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찻잔 속의 검은 물은 고요합니다. 아름다운 찻잔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깨지기 쉬운 도자기입니다. 값비싼 것이긴 하지만 쩝, 도자기 하나쯤이야. 당신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입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검은 물처럼 내 안에 머무르시길. 내 안에서 마침내 임종하시길. 바닷가의 소나무들이 한쪽으로 휘어졌듯이 나는 당신을 향해 긴 팔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라는 걸 확인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그것 때문에 당신은 괴로워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눈동자, 당신을 위해 쉬지 않고 테이프를 감는 녹음기, 당신을 보여 주고 당신을 들려주는 나는 당신과 ..
안녕 내 사랑, 널 떠나온 후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 라고 말할 수는 없어 나는 금요일 밤의 되돌아오는 피로로 네게 이별을 말했다 월요일엔 널 만나러 갈 거야, 난 중얼거렸지 이 멸망은 새로운 수태고지와는 아무 상관 없다네 천국까지 담뱃가게가 이어지는 거리를 알고 있다고 허풍 떠는 사내처럼 절반쯤 타다 만 담배를 어느 길고 긴 마음의 꽁초를 손쉽게 꺼버렸네 사랑의 하느님이 너무 오래 안식하시는구나 무한 속에서 선잠으로 뒤척이시고 월요일은 오지 않네 내일 아침이면, 결코 만나러 가려는데 따듯한 달걀이 깨졌는데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아 노란 고양이들이 울고 비가 오고 사막들은 결코 젖지 않고 툭툭 떨어진 붉은 머루알들이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는 어느 저녁의 긴 장화 아래 터지고 구름이 일꾼들처럼 흩어지고..
나는 너의 말로 말을 하고 너의 얼굴로 잠든다 내일, 이라고 적힌 글자들을 삼키며 물속 깊이 꽃들은 피어나고 울지 않는 밤이 다시 찾아온다면 너의 흙 묻은 신발을 오래오래 껴안고 있을 거야 어린 감나무를 심어 놓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연하디연한 살갗에 뺨을 대며 붉은 열매들이 나비처럼 꿈꾸는 상상을 할 거야 나는 너의 손으로 꿀벌의 투명한 날개를 쓰다듬고 너의 생채기로 선혈을 흘린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고요 속에서 아마 나는 네가 붙잡았을 최후의 기억 그때 웃고 있었다고 믿을 거야 분명히 그랬다고 믿을 거야 봄은 바짝 마른 입술처럼 바스락거렸지만 살아있다는 것들 중 침수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나는 가을에 태어났고 네가 없는 날 죽었다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
내가 신화 속에 존재할 먼 미래에 대해 궁리하다가, 나는 미래를 발길로 찼고 현재와 결별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생소한 창밖 응시하다보면, 고스란히 실내를 되비추는 창이 보이고 그곳엔 내가 허공의 실내에 화분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멀리 한 줄로 세워진 아파트 불빛이 보인다 이 빠진 불빛 한 군데가 마저 줄을 채운다 거기 사람이 왔나보다 여기도 사람이 있다 창문을 흔들어대는 낯설고 억센 바람, 그, 억센 손아귀와 싸우다 실내에서 지쳐버린 이 영혼 하얗게 타고 있다 가벼운 입김에도 휙, 흩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온 청춘을 저속하고 불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적 같은 몸뚱이를 아무데나 두고 자버렸고 내키는 대로 아무 꿈이나 불러들여 가위눌렸었고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헌 집처럼 오래오래 나를 비워두웠었다 때..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서로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왔지. 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 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 불행은 물속으로 녹아드니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너는 천천히 다가와 벽돌을 쌓는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담고 벽은 금이 가겠지. 옛집에는 스스로 울 수 있는 흙이 숨겨져 있다고 너는 병든 내게 말했다. 진흙을 개어 우물터를 쌓던 밤이 있었다. 부드러운 한밤 깊은 곳으로 우리는 갔다. 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버려지..
밤이었다 낮이라고 하기엔 우울했으니까 부모를 버리고 슬픔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아름답다 느낀 밤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없을 미움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나이를 잊어버린 눈빛이라 말해도 좋을 밤이었다 그날은 우연치 않게 우연으로 점철된 하루였다고 너는 말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너는 언젠가부터 취해 있다 느슨한 혀로 알 수 없는 문장을 발음하느라 자주 흐느낀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했더라 기억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느라 생긴 주름을 나는 어떻게 받아써야 할지 몰라 볼펜을 돌린다 시계 방향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다 보면 끝과 시작이 사라질 테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멈추거나 추락할 때도 있으니까 너는 한 문장을 바라보고 있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손이 부스러지고 부서진 문장이 슬로모션으로 달아나는 것..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쏟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읜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흘러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들쥐들이야 몇 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제 가을..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쳐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신의 슬픔이겠지요.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그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더는 찾아낼 수 없는 시간들을 미루어두려고 나는 너와 만났지 피크닉 바구니의 뚜껑을 닫고서 기차라도 타면 영원한 휴일은 완벽해지지 월요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까지 아침 창문에서 가장 멀리 어두운 곳까지 이해할 수 없는 날씨를 이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너와 사랑했지 구름은 비, 돌풍은 예감 우체국에서 날아오는 것들은 종이 위에 만들어진 가볍고 까만 죽음 그리고 하얀 잠만 남겨두려고 우리는 서로의 꿈을 다 꾸어버리지 열어보면 쉰 냄새가 풍겨 나올 풍경 바깥에 달린 손잡이들을 내버려두고 우리는 칙칙폭폭 달려가지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수첩이 하나 있다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숲속에 흑과 백이 섞여 흐려지고 있었다 숲과 수첩에 대해 매일 메모를 해 둬 오늘은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내일은 전화를 건 사실조차 잊을 수 있도록 검게 다시 나약하게 희게 다시 막막하게 페이지를 넘기면 낯선 페이지가 나타나고 휘갈긴 번호가 휘갈긴 시간들이 휘갈긴 마음이 휘갈긴 망각들이 가득 차도록 숲은 차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눈앞에 보이는 어둠이 지루해지면 잠이 들 테고 잠이 들면 다시 네 꿈을 꿀지도 모르지만 책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건 허리에 안 좋아 누군가 나를 밀어내는 저녁 오늘은 눈이 내릴지 모르고 아니 생각지 못한 불운이 덮칠지도 모르지만 숲은 검고 나약하고 검고 나약한 것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것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불우라는 말로 생을 요약하기에는 늘 저녁이 길었다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니 목젖이 눌렸다 밤은 또 왔지만 눈이 가만가만 내려서 차갑게 따뜻했다 손바닥에 묻은 실밥 어둠을 겨우 뜯어낸 뒤 쌀을 씻으면 세상이 사무쳤다 노안이 오래 됐으나 멀리서 보는 게 익숙했으므로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견딜 만했다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똥말똥 밥물 끓어오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숟가락이 무거웠다 물그릇에 살얼음이 잡혔다 다시 잠 못 들고 뒤척이면 알전구의 필라멘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정 너머의 치렁치렁한 그림자를 불우라는 말로 싹둑 접기에는 언제나 생이 무례했다
방은 또 하나의 방으로 방은 또 하나의 방으로 단 한 개의 방들로만 이루어진 우주라는 집 그 한가운데에서 직전의 그의 손목 검은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그를 살아 있게 하는 걸까 죽어가게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짜놓은 그물 한 올이 천천히 풀어지듯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간다 영원히 닫힌 방문은 방문일까 그렇다면 영원히 열린 창문은 창문일까 다락에서 오래전부터 소중하게 간직되어온 그것의 먼지를 털어내고 보니 하나도 예쁘지 않은 액세서리였던 것처럼 내가 찾아낸 나에게서 가장 많이 연루된 사람이 나였던 것일까 내일 밤의 파티 꽃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웃고 있는 나의 얼굴이 검은 원피스의 담배 연기 당신이 뱉어내는 뒷모습처럼 끝의 실루엣 또는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끝에 대해 당신은 가끔 이해할 수 있기라도..
전화는 언제나 불통이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배경으로 지나가고 어두워진 하늘에는 대형 네온이 달처럼 황망했었다. 비상구마다 환하게 잠궈진 고립이 눈이 부셨고 나의 탈출은 그때마다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살아있는 날들이 징그러웠다. 어디서나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고 목발을 쥔 나의 손은 수전증을 앓았다.
너는 침묵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가 너는 침묵할 때 진실로 사랑했는가 마음 착한 이들의 분노를 위해 그립고 푸른 하늘을 위해 너는 침묵할 때 죽음을 생각했는가 너는 침묵할 때 어머니가 그리웠는가 ​ 가을바람 불어와도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흐르던 강물조차 흐르지 않는 이 가을 눈부신 햇빛 속에서 너는 홀로 침묵의 들꽃으로 피었는가 너는 홀로 침묵의 저어새로 울었는가
내 의식의 추가 아직 잠자지 않고 알 수 없는 고요의 난간 사이를 흔들며 오갈 때 내 의식의 등이 아직 꺼지지 않고 먼 애탄의 거리를 꿈꾸듯 비칠 때 저 풀빛으로 잠자는 감성의 바다 너머에서 문득 무적을 불며 플로오렌쓰 그분의 깊은 고요의 공동을 내려가는 나의 도안엔 새로 혼자 갖는 환희가 있다 배경으로 물러가 집에서 오래 홀로 쉬며 꿈꾸는 자, 첨탑처럼 서서 그안의 종락에 귀기울이며, 푸른 달빛 속에 서서 고요한 저희 안의 우물을 퍼올리는 자 나는 먼 꿈의 방에 누워 자수를 놓으며 노래를 부르며 그 먼 환각의 회로를 돌아서 아름다운 동무들의 인도를 받는다 고요히 돛은 내리고 내 의식의 배가 아직 무엇가에 좌초되어 있을 때 죽은 풀빛의 바다가 잔잔히 가라앉고 그 위의 정박이 별빛으로 떠오를 때 내 안쪽 ..
먹구름 한 번 비쳐가지 않는 변두리 저수지 원래 있었다는 듯 배어나는 검푸른 어스름, 폐허를 기록하는 다른 이름은 첫사랑인가? 저절로 허물어진 담장을 끼고 녹슨 이를 드러낸 언덕길 선 채 말라죽은 나무 그 한가운데 윤곽만 남은, 수몰은 피해갔지만 적막을 비껴가진 못했다 정신의 피폐 생각하다 단 한 번 잘못 꺾은 산책길 사랑이 폐허처럼 오래 남기는 하나, 가만히 흔들리고 만다
어느날 새들의 임금님이 우리의 땅에 내려왔다.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누가 이카루스인가. 모두들 한번 날아 보아라」 태양 가까이 날아 날개가 불태워져 버린 아이에게만 불멸의 날개를 주겠다. 납이 아니고 뼈와 뼈의 날개, 녹을 수 없고 썩지도 않는 날개. 그러나 지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아이가 귀가 있어 그것을 듣겠으며 어느 날개가 천재가 있어 태양까지 날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다. 「이카루스만이 영원하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자(者)는 이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오, 지금은 시인도 청년도 사슴도 독수리도 아무도 날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아무도 날지 않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하늘 속에서 태양은 아름답고 태양 속..
내 눈은 가까운 곳을 보지 못한다. 너는 눈과 입과 귀를 스치는 바람인가 너는 내 심장을 기웃거린다. 너는 내 젖무덤에도 있고 뒤통수에도 있다. 콩콩 뛰며 들러붙어 있다. 키스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너는 늘 내 몸 어딘가에 기생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과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이끌고 있는가 미치광이 냄새가 풍겨온다. 달콤함이 진동하는 썩은 과일 냄새가 시간을 지배한다. 내 눈은 가까운 곳을 보지 못한다. 냄새가 키스를 몰고 오고 키스가 냄새를 밀어낸다. 등 뒤에서 초콜릿이 녹는다. 한밤의 태양이 녹고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는다. 너는 눈과 입과 귀를 스치는 바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날 한 시에 한 몸이 되어가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너의 언어가 나를 핥으며 미끄러진다. 나의 잠과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나의 옛날을 사는 당신과 당신의 훗날을 사는 내가 외따로인 것은 별빛처럼 빛이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아서이지 빛은 열에서 태어나지만 빛 없는 열은 당신이고 열 없는 빛은 나이니까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안녕의 시절은 시간이었지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였지 빛이 열의 손을 놓았던 때는 시각이었지 때를 새긴 어느 한 순간이었지 시간의 변주가 시작된 때였지 흩어졌지 오래도록 재편되지 않아 옛날이 훗날로 이행하는 중이었지 어둠을 길 삼아 고독한 길을 갔지 길은 고독을 배웠고 고독은 길을 익혔지 배우고 익혀도 기쁨은 따라오지 않았지 훗날을 사는 내가 멀리서 찾아갔지 옛날을 사는 당신이 찾아오지 않아 내가 당신을 찾아갔지 훗날이 옛날을 즐거워했지만 내가 당신을 즐거워할 뿐이었지 나를 사는 ..
바람 부는 날에 알게 되었다 슬픔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에 대하여 고요한 소용돌이에 대하여 줄을 풀고 떠나가는 때 이른 조난신호에 대하여 삐걱삐걱 날아가는 기러기들에 대하여 아마도 만날 것 같은 기분뿐인 기분 아마도 바위 같은 예감뿐인 예감 어디선가 투하되고 있는 이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구부려도 펴도 나아지지 않는,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녹색의 빈 가지가.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도시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젊어 보였다 죽음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죽어야만 가장 먼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달에 다녀온 사람도 알지 못했다 때로 깊은 밤 극장의 어둠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창밖으로 미끄러져가는 빙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지구만큼 오래된 한없이 깊은 잠 그런 밤이면 연필을 깎고 나는 백지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잠들어 꿈이 나를 떠났다
좁고 어두운 방 창가에 기대서서 마지막 햇빛이 떠나가는 걸 본다 오늘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오늘 산 자는 영원히 살지 않고 결코 다시 죽지 않으리 마지막 햇빛이 사라지는 걸 본다
더이상 수선을 할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코트가 내겐 한 벌 있지 짙은 녹색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산책을 나가야지 오늘은 긴 잠을 잤어 오래 뒤척이지 않고 멈추지 않는 꿈을 꾸면서 등이 아프고 피곤해 영화를 보고 싶어 상암으로 가서 을 보던 날을 떠올려 S양의 울음을 보았던가 바람이 많이 불어왔지 그날도 코트를 입었어 낡아버린 코트 모든 게 끝이 있지 응 모든 게 끝이 있지 스무 살처럼 푸른 나이도 푸른 관념도 푸른 희망도 응 모두가 희미해지지 붉은 고통도 선명한 사랑도 학교 안 커피집에는 에스프레소 새 컵이 나왔어 조그만 에스프레소 컵을 나는 좋아하지 흑빛도 쓴맛도 저 눈 감은 사람도 캠퍼스의 밤은 아름답지 나는 여름을 기다려 환상의 섬에 갈 거야 해변이 아담하고 인적이 드물다는 마을에서는 대마를 기르..
집은 햇빛에 불타고 나는 깨끗한 물에서 잠들었다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여름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은 길 끝에서 울었다. 혼자 먹은 저녁만큼 쓸쓸한 밤 내내 나는 망해가는 늙은 별에서 얼어붙은 구두끈을 묶고 있었다. 부탄가스 하나로 네 시간을 버티어야 해. 되도록이면 불꽃을 작게하는 것이 좋아. 어리석게도 빗속을 걸어 들어갔던 밤. 잠결을 걸어와서 가래침을 뱉으면 피가 섞여 나왔다. 어젯밤 통화는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울음만 기억에 남았고, 나는 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지대의 나무들은 또 얼마나 흔들리는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잠시 훔쳐온 불꽃이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네가 내가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저 침침하고도 축축한 땅속에서 시간의 가장자리에만 머물러 있던 너를 찾으려 했지 땅속으로 내려갈수록 저 뿌리들 좀 봐, 땅에는 어쩌면 저렇게도 식물의 어머니들이 작은 신경줄처럼 설켜서 아리따운 보석들을 빨랫줄에 걸어두는데 저 얇은 시간의 막을 통과한 루비나 사파이어 같은 것들이 땅이 흘린 눈물을 받은 양 저렇게 빛나잖아 가끔 너를 찾아 땅속으로 내려가기도 했단다 사랑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세월 속으로 가고 싶어서 머리를 지하수에 집어넣고 유리처럼 선명한 두통을 다스리고 싶었지 네 눈에 눈물이 가득할 때 땅은 속으로 그 많은 지하수를 머금고 얼마나 울고 싶어 하나 대양에는 저렇게 많은 물들이 지구의 허리를 보듬고 안고 있나 어쩌면 네가 밤 속에 누워 녹아갈 때..
봄의 그대는 벚꽃이었고 여름의 그대는 바람이었으며 가을의 그대는 하늘이었고 겨울의 그대는 하얀 눈이었다 그대는 언제나 행복 그 자체였다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
존재의 언어로 만나자. 부딪침과 느낌과 직감으로. 나는 그대를 정의하거나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대를 겉으로만 알고 싶지 않기에. 침묵 속에서 나의 마음은 그대의 아름다움을 비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소유의 욕망을 넘어 그대를 만나고 싶은 그 마음 그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허용해 준다. ​ 함께 흘러가거나 홀로 머물거나 자유다.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대를 느낄 수 있으므로.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
한여름에 들른 도시에는 장례 행렬이 도자기를 굽는 집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로는 도자기를 굽는 연기가 사막 쪽으로 울었다 동쪽으로 넘어가려다 총 맞은 21세 청년이라고 했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광객으로 걸은 적은 있었지 별이 인간의 말인 희망을 긴 어둠의 터널에 접어두고 먼지로 마셔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지 눈동자 색깔이 다른 고양이의 고향이라는 도시에서 택시 기사에게 그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느냐, 물어보았으나 그는 미쳤소, 하는 표정으로 숯불에 구운 닭이나 먹다 가시오..
어둠에 잠긴 해안선을 따라 눈이 흩어진다 수면 위로 내리는 눈송이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끔찍한 것을 외면하기 전 오래 응시하기로 ​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했어. 함께 봤던 영화에서 여자는 남자와 아이를 두고 떠나잖아. 여자는 자신의 옷도 핸드폰도 무엇도 챙기지 않고 빈손으로 집을 나서. 잠시 산책하고 올게. 영영 없어지잖아. 있지, 그런 밤들이 네게도 있었을 거야. 내 마음이 먼저 쏟아진 것뿐이라고. 숲에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고, 먼 곳에서 새들이 서로의 날개 속에 머리를 숨기는 바스락 소리가 들려. 여자는 그냥 걸었어. 앞으로 펼쳐진 길을 따라 끝없이 걸었어. 밤이 오면 걷던 길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다가 해가 뜨면 다시 걷기 시작했지. 비가 오는 날에도 해가 내리쬐는 날에도. ..
외벽에 녹슨 고래 몇 마리 물 바깥으로 나와 숨을 쉰 흔적 그 숨을 찾는 심장소리가 손끝에서 떨렸다 혼신을 다해 호기롭게 살았을 먼 우주를 되짚어도 더 이상의 숨은 없다 때때로 바람이었다가 절벽이었다가 수세기의 흔적이 수 천 년 거리에서 천변 반구대를 서성였을 내세의 염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수단이 손아귀 힘이었다면 피눈물로 쪼아서 새긴 그 기원이 울음에 갇혀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늙은 고래가 볼모로 잡혀있다 녹슨 세월이 한데 엉겨 붙어서 아직 물을 건너지 못한 배고픔과 서러움 매질과 학대와 손가락질 슬픈 작살에 핏물이 번지고 뼈와 살이 바람으로 흩어지고 다른 행성에 잘못 온 것처럼 가압류 딱지가 붙어버린 고래의 적막은 한겨울처럼 쓸쓸하고 세상의 기억은 겨울 끝에 머물러 있다
익은 감자를 깨물고 너는 혀를 내밀었다 여기가 화장실이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무도 듣길 원치 않는 비밀을 발설해버렸다 너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에게로 천장으로 스르르 바깥으로 방사능이 누설되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기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듯,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노폐물을 배설했다 노폐물은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았지 너의 용기에 힘껏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내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다 소문처럼 온 동네를 반나절만에 휩싸버렸다 문득 폐가 아파와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더 마려웠다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별들의 무덤과 야생조들의 신비한 날개들이 감옥창살처럼 종신수로 갇히어 창백하게 메마른 쇠스랑꽃 몇 포기를 조화(弔花)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길들이 오늘밤 꿈에도 분..
젊었을 때 난 지적인 대화라는 걸 믿었다 퀴퀴한 담배 연기 속에서 우리가 짠 무늬들이 높이 올라가 사상의 천국에 도달할 거라 생각했다 고매한 남성들의 담화에 참여할 자격을 인정받으려고 채칼에 갈리는 감자마냥 무시와 부대꼈고 모욕을 삼켰고 바닥의 진흙 속을 당당하게 헤치며 걸었다 그들이 진정성과 실존주의적 권태를 논하는 동안 여자들은 나가서 맥주를 사다 날랐고 부엌에서 낙태를 했으며 아이들 밥을 먹였고 경매로 팔려갔다 마침내 나도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깨달았다 새로운 시를 내 손에 담아서 들고 와 보여줬을 때 사르트르와 맑스의 사상을 지도로 만들어 펼쳐보였을 때 그들은 말했다 '쟤 지금 우리한테 관심받고 싶은 거야' '자기 가슴과 허벅지를 보여주는 거야' 그들과 동등했던 난 덜덜 떨면서 조심스레 걸었..
상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소란스런 꿈에서 달아난 밤에는 태풍에 떨어진 낙과처럼 자신의 모습을 개 짖는 소리에 묻어버리고 싶었네 뜬눈의 소음들이 난무하는 목소리, 그 지겨운 목소리들 부엌에는 추리소설을 읽는 선한 눈동자가 안방에는 스모 경기를 보는 중년의 입술이 있어 헐벗은 마음을 가두고도 사료 주지 않는 소녀의 뒤꿈치가 절름거리고 이 축축한 세계에선 누구도 멀리 가지 못하네 목책 아래 가시풀이 바람을 휘감고 침묵 속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지평선 되어 마른눈으로 대기를 감싸는 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필연조차 우연으로 가장하고 우연의 무력함으로 나는 사람처럼 살아가려 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애매한 용서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늙고 병약한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건반을 누르던 밤 패배..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거지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거지 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의 횃대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네 결코 그칠 줄을 모르고 모진 바람이 불 때 더욱 감미롭고 참으로 매서운 폭풍이라야만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이 감싸 준 그 작은 새를 당황케 할 수 있으리 나는 얼어붙은 땅에서도 이후 낯선 바다에서도 그 소리를 들었네 허나 아무리 절박해도, 결코, 내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네 더보기Emily Dickinson,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That perches in the soul,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And never stops at all, And sweetest in the gale is h..
어쩌면 내가 그대의 묘비를 쓰게끔 오래 살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흙 속에서 썩고 있을 때 그대 살아 있을 것이라. 어쨌든 그대의 기억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내게 속하는 모든 것이 다 잊힌다 해도. 그대의 이름은 이 시에 의하여 영생하리라. 나는 한 번 죽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지마는 그리고 땅은 나에게 보통 무덤만을 주지만, 그대는 사람들의 눈 속에 누우리라. 그대의 비문은 나의 정다운 시라. 그것은 아직 창조되지 않은 눈들이 읽고, 이 세상에 태어날 혀들이 그대의 이야기를 하리라,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에. 그대는 언제나 살리라. 내 붓은 그런 힘 있나니. 숨결이 약동하는 곳, 사람의 입속에서.
이 모든 것에 지쳐 나 평온한 죽음을 갈망하네. 재덕이 걸인으로 태어난 것을 보고, 공허가 화려하게 치장한 것을 보고, 순수한 신의가 불행히 기만당한 것을 보고, 찬란한 명예가 부끄럽게 잘못 주어진 것을 보고, 순결함이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완전무결함이 부당하게 더렵혀지는 것을 보고, 강한 힘이 절름발이에게 꺾여 무력해진 것을 보고, 학예가 권력에 의해 함구당하는 것을 보고, 어리석은 자가 학자인 양 능숙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을 보고, 간단한 진리가 무지한 것이라 오해받는 것을 보고, 선한 포로가 악한 적장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에 지쳐서, 나는 죽어 사라지길 원하네. 다만 내가 죽으면, 내 사랑을 홀로 내버려두게 되어서.
그곳에 들어갔다 오면 너는 과거의 사람 너는 부드럽고 네 옷은 잘 여며져 있으나 내가 만지던 피부는 그 아래 없네 나는 두렵고 나는 기억을 직조하지만 너에겐 이성이 없지 먼 곳으로 너를 보내고 나는 잠 속의 잠이 들어 태양은 끝없이 돌고 너의 피부는 너무 하얘서 나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볼 수가 없네 그곳에 가지 않아도 너는 돌아오고 너는 내 안에서 나오지 않았네
없는 네가 가장 아름답다 일생에 단 한번 붉은빛 새순을 틔우고 비틀비틀 떠나는 자여, 어디에서 비척이며 연명하던 행려병자이기에 부끄러움 모르고 알몸으로 섰는가 가시 박힌 수레바퀴를 굴리며 네가 다가온다 오늘 세계는 물그릇처럼 아프다 밤의 태양은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워 울고 있다 홀로의 좌표들을 풀어놓고 너의 입술을 만지는 일은 세로로 여닫힌 괄호를 더듬는 일 같았다 네 생에 조금 관여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얼음을 꽉 쥐면 슬픔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나온다 너는 천천히 젖어간다 왜 돌아가는가, 물어볼 적마다 꿈의 언저리에서 자꾸만 두 발이 굳어갔다 수은이 흐르는 강을 건너며, 오늘은 등(燈)을 켜들지 말자 벼랑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너의 눈가에 별들이 가득 고였으니 한 밤을 버리고 굳어버린 매듭..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위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산천,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茶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잔에 넘쳐 흐르던 시간은 언제나 절망과 비례했지 거짓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마음은 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어 이제 겨우 내 모습이 바로 보이는데 너는 웃으며 안녕이라고 말한다 가려거든 인사도 말고 가야지 잡는다고 잡힐 것도 아니면서 슬픔으로 가득한 이름이라 해도 세월은 너를 추억하고 경배하리니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내 다정한 안부를 전해요 둘이 듣는 혼잣말처럼,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속삭임처럼 여기는 지구의 첫 별이 뜨는 곳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모서리를 접는 곳 이상하게 부풀었다가 기쁘게 사라지는 곳 그러니 잊어도 좋아요 구름이 구획하는 바람이 우리를 거둘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여행을 떠나요 기억할 필요가 없어요 뚫린 천장 위로 날아간 새가 자신의 곡선을 기억하지 않듯이 처음 태어난 지도를 따라 단종(斷種)될 말들의 사막을 건너가요 모래의 책을 건널 때마다, 넓어서 캄캄할 때마다 깊은 구름이 달려왔다 나는 절망을 절정으로 바꿔 적기 시작했다 내가 건넌 것은 구름의 푸른 웅덩이 내가 지나야 할 곳은 푸른 웅덩이 속 검은 구름 나는 어제보다 느려졌고 나는 내일보다 조금 길다 그래서 모른 것이 슬프거나 아는 것이..
발이 편한 구두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꿈과 계급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죽고 싶었지만 실패한 건 아니었고 난 아무것도 가슴에 묻지 못했다 잠이 깨면 우박 같은 게 내리던 거리 잠결로 쏟아지던 어머니, 하늘에 계신 죽을 힘을 다해 꿈꾸는 거리는 몇 달째 공사중이었고 구멍가게 앞에선 밤마다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졌다. 뭘 그렇게 미워하며 살았는지 피 묻은 담벼락엔 미친 듯 살고 싶은 우리가 남아 있었다. 개새끼 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고 어떤 꿈도 몸에 맞지 않았다 우리는 늘 그리워했으므로 그리움이 뭔지 몰랐고
남자는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신전 기둥에 모든 새들의 머리가 자신의 사랑을 경배하도록 새겨놓았다. 지혜롭다는 새들의 머리는 수천 년 동안 욕망을 마주했지만, 세월이 그것보다 먼저 욕망을 반박했다. 남자는 울부짖었지만 여자는 사하라의 먼지가 되어갔다. 파이터였던 남자는 더 많은 기둥을 세우다 미쳤고, 서풍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폐허의 불문율이 있다. 묻어버린 그 어떤 것도 파내지 말 것. 폐허 사이로 석양이 물처럼 흐를 때 속수무책으로 돌아올 것 오늘 밤 모래바람이 등고선을 바꾸고 사막여우 한 마리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콜라 병을 핥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진다. 마지막 무개화차가 지나간다.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槍)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의 푸른 속력 속에서 흐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